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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니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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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KBO 리그에 소속이었던 프로 야구단. 삼청태현의 역사를 마무리한 구단으로 네 곳 중에 가장 긴 역사를 기록했던 구단이자[13]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14] 구단이었다. 연고지는 인천광역시, 경기도, 강원도 → 무연고[15] / (비공식)경기도 수원시.[16] 1996년 취임해 팀 최후의 순간까지 함께 한 김용휘 단장[17] 이하 구단 프런트가 개념이 넘친 현장 지원으로 명성을 떨쳤고, 역대 감독은 김재박-김시진이었다. 팀의 상징동물은 유니콘, 상징색은 녹색과 노란색.[18][19] 해체 이후 인적 자원과 지명권은 우리 히어로즈가 승계하였다.
역사는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부터 시작됐으며 현대 유니콘스로서의 역사만 따지면 1996년 창단, 2008년 1월 해체된 팀이다. 연고지는 인천광역시-경기도-강원도로 숭의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썼으나 1999년 시즌 종료 후 서울특별시로 연고지 이전을 선언했지만 서울에 정착하는 데에는 실패했고 결국 제2 홈구장으로 쓰던 수원 야구장을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임시 홈구장으로 썼다.
별명은 투수 왕국. 태평양 돌핀스 후기 시절부터 좋은 투수진을 여럿 배출하던[20] 이 팀의 팀컬러는 현대 유니콘스로 팀명이 변경된 이후에도 꾸준히 이어져 내로라하는 투수들이 정말 많았다. 정민태, 정명원, 위재영, 김수경, 임선동, 조용준, 장원삼 등이 현대 유니콘스에서 활약한 투수들이며 무려 4명의 투수신인왕을 배출했다. 1998년 김수경, 2002년 조용준, 2003년 이동학, 2004년 오재영.[21]
삼성 라이온즈와 더불어 쌍방울 레이더스와 포스트시즌에서 대결해본 두 팀 중 한 팀이다.[22]
2.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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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대 엠블럼[편집]
4. 유니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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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역대 등번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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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해체 당시 선수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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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역대 구단주[편집]
8. 역대 감독[편집]
1996년 현대 유니콘스로 팀이 개편되기 전까지는 대대로 팀 전력이 최약체를 벗어나지 못한 탓에 역대 정식 감독 중 재임 중 승률이 5할을 넘긴 감독은 김성근과 김재박 뿐이다. 팀의 간판이 네 번이나 바뀌었고 현대 시절을 빼고는 하위권을 전전했지만 구단 역사 전체를 통틀어 본다면 감독 교체는 생각보다 빈번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 LG 트윈스 등은 10명 이상의 감독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졌지만 삼미부터 현대까지 정식 감독의 숫자는 삼미 초대 감독인 박현식부터 유니콘스 최후의 감독 김시진까지 9명이었다. 이는 구단의 26년간의 구단 역사 중 절반에 육박하는 11년간 김재박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던 영향이 크다. 물론 현대 시절을 빼고 삼미부터 태평양까지만 친다면 성적 부진으로 인한 감독 교체가 꽤 잦았다고 볼 수 있다.
9. 역대 선수[편집]
현역 선수 및 기타 야구인으로 활동 중인 경우에는 비고란에 표기하였다.
2024-05-31 03:02:26 기준 현재 남아있는 현대 출신 현역 선수들은 총 4명이다.[33]
9.1. 투수[편집]
9.2. 포수[편집]
9.3. 내야수[편집]
9.4. 외야수[편집]
9.5. 역대 외국인 선수[편집]
- USA: 미국
- DOM: 도미니카 공화국
- VEN: 베네수엘라
10. 역대 성적(삼미, 청보, 태평양 시절 포함)[편집]
10.1. 역대 개인 성적[편집]
개인 커리어 전체가 아닌 삼청태현 소속이었을 때의 성적이므로 1982년부터 2007년까지의 기록만 서술한다.
10.1.1. 통산 성적[편집]
10.1.1.1. 투수[편집]
10.1.1.2. 타자[편집]
10.1.2. 단일 시즌[편집]
굵은 글씨는 역대 최고 기록.
10.1.2.1. 투수[편집]
10.1.2.2. 타자[편집]
10.2. 역대 포스트시즌 상대 전적[편집]
11. 응원가[편집]
11.1. 공식 응원가[편집]
1996년 창단 때부터 마지막 시즌인 2007년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응원가를 부른 사람은 디지몬 어드벤처 OP를 불렀던 홍종명이라고 한다. 출처
한 때 디시인사이드 야구 갤러리에서 응원가 관련 게시물의 댓글에 누군가가 '홍서범-조갑경이 부른 것 같다'라고 개인적인 의견을 적은 것이 갤러리 내에서 와전된 후 꽤 널리 퍼져 사실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다. 게다가 익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홍서범은 LG 트윈스가 지면 다음날 집안 분위기가 개판이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LG 트윈스의 광팬이다. 때문에 1996년 창단 당시 현대 구단에서 거액을 제시하며 응원가 녹음 제안을 했다고 하더라도 LG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한 홍서범이 수긍을 했겠느냐는 의견이 있다.
서울 히어로즈 창단 초기에는 이 응원가의 현대! 유니콘스! 부분을 최강! 히어로즈!로 바꿔서 부르기도 했으나 원곡의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고 여러 논란들이 겹치며 폐기처분돼 지금은 쓰이지 않는다. #
11.2. 비공식 응원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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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혼성그룹 김트리오가 발매한 대중가요.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부터 사용돼 인천 프로야구 연고팀을 상징하는 응원가인 만큼 현대 유니콘스도 이 응원가를 사용했었다. 전신 태평양 돌핀스 인수 후에도 전통을 이어받아 연안부두를 비공식 응원가를 사용했었고 2000년 연고지 이전 후로는 당연하게도 쓰이지 않았다. 여담으로 전신 팀 중 하나인 삼미 슈퍼스타즈 매각 당시와 현대 유니콘스의 연고지 이전 당시 성난 인천 야구팬들은 야구장 앞에서 연안부두를 부르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었다.
12. 역대 캐치프레이즈[편집]
- 1996년 ~ 1997년: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60]
- 1998년: 도전! '98!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1999년: 도전! 2연패!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0년: 정상 새천년!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1년: 정상 2001!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2년: 도전 2002!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3년: 새로운 도전! 승리의 이름!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4년: 불패신화! 끝없는 도전!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5년: 멋진 승리, 끝없는 도전!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6년: 도전! 열정! 투혼!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7년: 새로운 각오! 새로운 신화!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13. 사건 사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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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마스코트[편집]
유니콘을 마스코트로 했으며 유니와 코니 둘이서 등장했었다.
또한 말 인형탈을 쓴 사람과 대결을 한 적이 있다.
그렇게 2007년을 마지막으로 영원히 등장하지 않는 줄 알았으나...
2022년 올스타전에 오랜만에 등장했다.
15. 인기[편집]
단기간에 4번의 우승을 이뤄냈음에도 불구하고 비인기 구단이었다.
사실 현대도 1995년 말 태평양을 인수해서 인천에 터를 잡고 있던 1999년까지는 인천에서 인기가 꽤 높았던 팀이었다. 인천에 계속 살았다면 달랐겠지만 2000년 1월 명목상의 연고지 서울을 가기 위해서 인천 연고권을 신생 창단팀인 SK 와이번스에 넘겼고 경기도 수원시를 임시 연고지로 삼아서 경기를 했다. 그러니 수원 주민들은 현대 유니콘스를 그저 우리 동네에 잠깐 있다가 서울로 갈 팀으로 생각 할 수 밖에 없었기에 당시 수원 야구장은 늘 비어 있었다.[61]
16. 팬[편집]
2000년대 이후부터는 인기 구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팀으로 전락했지만 그 전까지는 이 팀을 응원하는 팬들이 꽤 있었고 유명인 중에서도 현대 팬을 자처하던 이들이 있었다.
2000년 연고지 이전 이후에도 줄곧 이 팀을 응원했던 유명인으로는 가수 겸 펀드매니저로 활동했던 김광진이 대표적이다. 과거에는 인천광역시 출신의 배우 윤철형도 이 팀의 열성팬이었고 인천 출신인 류현진[62] 또한 과거 이 팀의 어린이회원이었다. 기사에 나오는 두 번째 사진을 보면 친형 류현수씨와 함께 유니콘스 어린이회원 모자 착용 및 유니폼을 입고 있다. 류현진과 동기생인 이재원도 이 팀의 어린이회원이었는데 인천 연고팀 소속의 프로 선수가 되고 나서 현대 구단이 해체되니 만감이 교차했다고 자신의 미니홈피 다이어리에 쓰기도 했다.
반면 삼미 시절부터 이 팀의 열혈 팬을 자처했던 개그맨 지상렬, 염경환, 이혁재 등은 2000년 연고지 이전 이후 신생팀인 SK 와이번스로 응원팀을 옮기게 된다.
17.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지 않았다면?[편집]
야구계에서 2007년은 그야말로 눈물의 한 해라고 할 만하다. 현대 유니콘스의 해체와 동대문야구장의 철거라는 한국 야구의 양대 비극이 모두 2007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비극적인데, 바로 다음해인 2008년, 한국 야구는 베이징 올림픽 우승이라는 희대의 빅이벤트 속에 엄청난 팬덤 증가와 중흥을 맞이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니콘스 매각을 진행했다면 프로야구단 인수에 대한 기업들의 관심과 여론의 추이는 2007년보다 높았을 거라는 푸념이 있다.[63]
하지만 이미 이 시기에는 KBO가 오랫동안 모아왔던 야구기금을 유니콘스를 대신 운영하는데 다 털어먹었기에 여력이 소진된 상황이었고[65] , 여기에 발전기금으로 끌어다 쓰던 유니콘스 구단측은 끝끝내 플로리다 전지훈련을 가는 등 말년의 쌍방울 레이더스나 해태 타이거즈처럼 뼈를 깎는 인건비 절감 노력을 하긴커녕 기존에 쓰던 예산을 절감하려는 노력도 아예 하지도 않고, 야구계 전체의 돈을 탕진해서 자기들 성적을 내려 한다는 인식이 박힌 다른 구단들로부터 시선이 싸늘해진 상황이었다. 2007년 시즌 말의 상황은 그야말로 급박했으며, 더이상 시간을 끄는 건 그냥 불가능했다. 게다가 결국 유니콘스가 해체되어 7개 구단 체제가 되면 '이참에 우리도 해체할까?'라며 추가로 해체를 검토하고 있다는 구단들이 있다는 루머는 파다하게 퍼져 있었고 그렇다면 리그는 순식간에 쪼그라들 상황이었다. KBO가 센테니얼의 창단 의사를 거부할 수 없었던 건 이런 이유가 크게 작용했을 수 있다.
사실 2008년의 프로야구 인기의 부활[66] 에는 오랫동안 야구계에 그림자를 드리웠던 유니콘스 문제가 해결된 것도 영향이 있었고, 만약은 모르는 것이지만 이 문제가 계속 되었다면 2008년 이후의 인기부활이 가능했을지는 불명확하다.[68] 이후 히어로즈 구단이 한 동안 메인스폰서를 구하는데 애를 먹은 것에서 볼 수있듯, 리그의 인기증가를 통한 경제적 효과가 기업에 얼마나 이득이 될 것이며, 기업이 이를 체감하고 투자를 결정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당시 KBO는 지나치게 일찍 협상사실을 공개하거나 기존 구단과의 물밑협상을 거치지 않는 등 매각 협상에서 많은 잘못을 저질렀으나, 이미 야구계의 여력은 소진된 상태에서 언제 또 다시 온풍이 불지 알 수없는 상황이었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다른 대기업들마저 듣도보도 못한 센테니얼에게 유니콘스를 넘기는 선택에 동의할 정도였던걸 생각한다면, KBO의 선택을 그저 매도하는 것은 부당할 것이다.
18. 여담[편집]
- 최훈이 GM에서 수원 램스의 기본 컨셉을 이 팀에서 가져왔고, 램스라는 이름은 세인트루이스 램스에서 따왔다. 다만 후속작인 클로저 이상용에서는 넥센 히어로즈 쪽을 참고한걸로 보인다.
- 2020년 시즌 종료 기준으로, 삼청태현의 구단역사에서 현대 유니콘스 시절만 따로 계산하면 KBO 리그에 존재했던 모든 구단 가운데 라이벌 삼성 라이온즈에게 역대 상대 전적에서 앞서고 있는 유일한 구단이 된다. 현대 시절의 삼성 상대전적은 121승 6무 94패.[69] 특히 조용준과 미키 캘러웨이는 해체된 지 시간이 좀 흐른 지금에도 삼성 팬들 사이에서 회자될 정도로 삼성 상대로 무시무시한 포스를 자랑했다.2004년 어린이날에 진행된 경기는 삼성에 9회까지 8-4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연장까지 끌고가서 끝내 14-10으로 승리를 가져갔는데 그 충격의 여파로 '창단 후 10연패'라는 흑역사를 열게 한 시발점으로 삼성팬들에게 회자되고 있고, 같은해 한국시리즈에서는 배영수가 10이닝을 노히트 노런으로 끌고 갔어도 결국 경기를 가져가지 못하게 한 것도 있는데다, 이 시리즈에서 배영수의 글러브 패대기 장면을 만들었던 당시 무명선수급 인지도였던 백업 전근표의 한 방까지 나왔다. 그러다보니 현대가 삼성을 상대로 루징시리즈를 기록했던 시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삼성팬들의 각인으로는 항상 안풀리거나 발목을 잡는 상대로 현대 유니콘스를 꼽아서 회자하곤 한다. 삼성팬 중에서는 이러한 임팩트가 워낙 강해서 현대 선수단은 유명선수 무명선수 신인 베테랑 할 것 없이 전부 삼나쌩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팬도 있었을 정도다. 정규 시즌 이외에도 2000년 플레이오프 현대 4전 전승, 2004년 한국시리즈 현대 4승 3무 2패 등 삼성은 현대만 만나면 힘을 쓰지 못했다. 여기에는 당시 유니콘스의 프론트가 동종업계 라이벌이었던 삼성과의 승부결과에 굉장히 민감했고, 이에 따른 추가적인 인센티브까지 부여해서 따로 격려했다는 이야기가 있다.[70]
- 반대로 LG 트윈스에게는 삼청태 시절이나 현대 시절이나 꾸준히 약했다. LG가 비밀번호를 찍던 때에도 밀렸으며, 1994년 한국시리즈와 2002년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스윕을 당했으며,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우승했지만 상대전적에서 밀렸다.(7승 11패)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했던 2000년에도 가장 고전한 팀이 LG였다.[71]
- 특이하게 해체될 때까지 같은 범현대가인 KIA 타이거즈와 포스트 시즌에서 붙어본 적이 없었다. 2002~2004년, 2006년에 가을야구에 동반 진출을 한 적은 있었으나 모두 교묘하게 대진이 빗겨나갔다.[72][73]
- SK그룹이 2012년에 이 구단의 모기업이자 대주주인 하이닉스를 인수했는데, 만약 이 구단이 그때까지 해체되고 않고 유지되었다면 SK그룹은 하이닉스 인수를 망설였거나[74] 과거 프로농구처럼 두 개의 프로야구단을 운영하게 되는 난처한 상황을 맞이했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참고.
- 2022 시즌 후 전유수, 이현승이 은퇴하며 현역으로 뛰고있는 현대 출신 선수는 오재일, 정훈[75] , 황재균, 장시환 4명만 남았다. 현대의 지명을 받은 선수까지 포함하면 임창민[76] 도 있다.
- 유독 한국시리즈를 쉽게 우승한 적이 없었다. 1998년 4승 2패로 6차전까지 치르고 나서야 우승했는데 이게 네 번의 우승 중 가장 적은 경기로 우승한 것이다. 2000년에는 3승을 먼저 거둬 손쉽게 시리즈를 가져가는 듯 했으나 두산에게 4~6차전을 내주면서 리버스 스윕 직전까지 갔으나 7차전을 이겨 4승3패로 우승하였다. 2003년 역시 SK와 승패를 주고받으며 7차전까지 치른 후에 우승하였고, 현대의 마지막 우승이었던 2004년에는 무려 9차전까지 치르고 난 뒤에야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 2023년 현재 구단을 승계하지 못하고 해체된 팀은 현대와 쌍방울 레이더스 두 개인데 묘하게 서로 접점이 있다. 현대는 1993년 쌍방울 레이더스 인수를 시도하기도 했고, 1996년 쌍방울의 첫 가을야구 상대는 현대였다. IMF로 선수들을 팔던 쌍방울로부터 박경완, 조규제 등 선수들을 뽑아오며 쌍방울의 몰락과 해체에 일조하기도 했지만, 나중에 돈이 없어진 현대가 결국 해체된 날은 쌍방울과 동일한 1월 7일이었다.
19. 관련 문서[편집]
- 삼청태현
- 키움 히어로즈 - 현대 유니콘즈 해체 이후 인적 자원을 이용하여 새롭게 창단하였다.
- SSG 랜더스 - 현대 유니콘즈의 연고 이전 이후 인천 야구의 계승자가 되었다.
- kt wiz - 현대 유니콘즈의 임시 홈구장인 수원 야구장의 새 주인이 되었다.